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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6일 목요일

내가 좋아하는 선수-배구 김세진



 
김세진 (스포츠해설가, 전 배구선수)
출생: 1974년 1월 30일
신체: 200cm, 83kg
데뷔: 1995년 삼성화재 배구단 입단
취미: 농구, 컴퓨터 게임
별명: 세발이, 코트의 귀공자, 월드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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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축구도 아니요, 야구도 아니요, 배구에 빠져서 살던 시절이 있었다.
(난 왠만한 스포츠는 다 좋아하니깐...ㅋㅋㅋㅋ)
바로 김.세.진 선수 때문이다.(물론, 김세진선수와 함께 신진식선수도^^)

내가 삼성화재의 팬이 된것도 이선수 때문이요,
어린데도 충무체육관가서 배구경기 관람하고 있던 것도 이선수 때문이요
배구 tv중계 빼먹지 않고 챙겨 보는 것도 이선수 때문이였다.

배구는 프로화가 늦게 되었지만,
프로화되기 이전이 더 인기있었던거 같다..
게다가 축구보다도 더 인기 있었었다. 나 초등학교때니깐 90년대 중반, 후반쯤?
내 느낌에는 아마도....ㄷㄷ

신진식과 김세진이라는 걸출한 스타를 앞세워
배구는 인기행진을 이어간다.
이때, 두선수는 미친듯이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고...
하지만, 99년 동시에 결혼을 발표하시고는 유유히 유부남의 길을 걸어가셨다..

김세진선수는 라이트공격수로써 해결사 능력이 매우 좋은 선수이다.
배구선수로는 특이하게 왼손공격수다(물론 오른손잡이이나 감독의 권유로 피나는 연습으로~)
그래서 더 막기 힘들다는,,,ㅋㅋ
게다가 얼굴도 잘생기고 배구 선수 특성상 기럭지도 길고
능력도 되니 스타 플레이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김세진선수는 선수 생활동안 한참을 우리나라 넘버원 라이트로 활약한다

오죽하면 그 뛰어난 후인정선수가 매번 김세진 선수에게 밀려 만년 2인자 소리를 들었을까..ㅜ
게다가 삼성의 장병철 선수같은 우수한 선수들도 같은 포지션인 김세진 선수에게 밀려
벤치에 앉아있었을까......ㅜㅜ

잔부상도 많고,
나이는 속일 수 없는지라 점점 교체되어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투입될때면 노련하고도 해결사적인 기질 제대로 보여주셨다.

김세진 선수는 큰 키를 이용하여,
블로킹을 피해 공격하거나, 상대방 공격을 블로킹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중요한 대회, 국제냐 국내냐를 따지지 않고
중요한 순간마다 블로킹을 하거나, 포인트를 올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삼성화재에서 우세진-좌진식은 최강이였고,
아무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삼성화재는 연일 연승행진을 이어갔고,
그 중심에는 김세진이 있었다.

중학교땐가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한일전을 해서 보러간 적이있었다.
그때 김세진 선수를 볼 수있다는 생각에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그때당시, 점점 배구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어다. 이유인 즉슨, 삼성화재가 승리만 해서 재미가 없었다....ㅜㅜ)

그때, 내 믿을 수 없는 기억으로는 3:2로 역전 승을 거뒀던것 같다. 아마도...정말,,아마도
진짜 김세진선수만 보면서 미친듯이 응원해댔었다.
국제전은 처음 본것이라,, 게다가 한일전이였기에 더욱 기억에 남지만서도,
역시 국내 최고라 하는 선수들이 모여있었기에, 그중심에 김세진선수가 있었기 때문에 기억이 더 남는다.

배구가 프로화된다는 소리에 난 속으로 삼성이 대전 연고를 가지길 바랬다.
그럼 내사랑 대전 현대(농구)가 떠나간 자리를 조금이나 메꿔줄꺼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삼성이 대전을 연고로 하는 것이 아닌가!꺄울~

정말 감격했다. (야구는 한화, 배구는 삼성, 축구는 대전시티즌, 농구는,,,,,,,,,글쎄 KCC냐 삼성이냐 고민중이다.)

하지만, 김세진 선수의 사생활이 이렇고 저렇고 가쉽거리가 되는 것에 매우 안타까웠다.
그만큼 스타성이 큰 선수 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하나 그래도 그랬다.

2006년, 김세진선수의 은퇴소식이 들려왔다.
허걱,,ㅜㅜ 생각보다 빨리 은퇴해서 슬펐다. 1-2년은 더 뛸줄알았다...ㅜㅜ
그는 담담하게 은퇴식을 했고, 말잘하는 그는 인터뷰 또한 담담하게 하셨다.

그래도 여러가지 사업도 하시고, TV중계해설도 하시는 모습을 보니 좋다(물론 해설하시면서 욕좀 들으셨던거 같다ㅜㅜ)

나의 최고의 라이트
우세진-좌진식의 최강 콤비!
김세진 선수 최고다~

[덧붙이기]
김세진선수, 신진식선수 여기 밑에 사진에서 둘이 웃는모습이 비슷하다...ㅋ보기좋아~
세진선수랑 진식선수 사진찾다가 충격적인 사진있었는데 차마 올리지 못하겠다...ㅜㅜ
 
 

김연경 올림픽 배구 MVP 수상, 시라이-랑핑을 넘어 최고의 선수로 가는 여정



대한민국 여자 배구팀의 주 공격수 김연경 선수가 2012 런던 올림픽 여자배구 MVP를 수상했다.
아울러 득점상까지 거머쥐었다.

이번 김연경의 올림픽 MVP 수상은 이례적이라고 본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는 결승전에서 높은 블로킹과 고공 토스로 중국을 우승시킨 펑쿤세터가 MVP였고 2008 베이징 올림픽 때도 그랑프리 우승만 쉴새 없이 찍던 브라질이 드디어 올림픽 우승과 함께 MVP도 파울라 선수가 가져갔다.

한국대표팀은 3-4위전에서 아쉽게 일본에 패하며 4위에 머물렀지만 우승팀 브라질이나 준우승팀 미국이 아닌 최고 득점상을 가져간 김연경 선수가 MVP에 오르며 여자배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올림픽 배구 수상은 시상식을 따로 하지 않고 기록으로 남기는 걸로 알고 있다.
88서울 올림픽 때 전천후 배구선수였던 박미희 선수가 토스, 리시브 등 개인 종합 1위에 올랐었다.
아쉽게 4강문턱에서 주저 앉았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도 제2의 박미희로 불렸던 박수정 선수가 리시브 1위를 했던 기억이 있다.
 
김연경선수의 등장 이후 안타깝게도 한국 여자배구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90년대 김철용 사단으로 대변되는 호남정유 중심의 여자배구팀은 1994년 세계선수권 4강, 1999년 월드컵 3위, 1994년 아시아게임 1위 등의 성적을 올렸고 강력한 수비 조직망과 세트플레이의 정석을 보여주며 세계 6강권을 꾸준히 지키고 있었다.
장소연-구민정-강혜미 등의 현대건설 사단으로 이어져 온 대표팀도 4강을 넘보는 까다로운 강팀의 명백은 계속 유지했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이후 노장들이 은퇴하고 세대교체에 실패하며 대표팀이 추락하던 시기 장신화에 성공은 거두었지만 급격히 떨어진 수비조직력으로 한국 여자배구팀의 명성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90년대 그렇게 바라던 장신 공격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송이, 김민지에 이어 김연경 선수가 2005 월드 그랜드챔피언대회에 나왔다.
3선수와 노장 최광희 선수가 레프트로 출전했고 김연경은 여고 3학년이라는 나이에 맞지 않게 돋보이는 활약을 펼쳤다.

이후 김연경은 매번 국가대표에 뽑혀 국제대회에서 가공할만한 득점력을 뽑냈지만 한국팀의 성적은 좋지 못해 실력에 비해 빛을 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일본의 시라이, 중국의 랑핑을 넘어 한국의 김연경

배구는 단체 종목이다. 한 명이 아무리 뛰어나도 다른 선수들의 뒷받침이 없다면 성적이 좋게 나올 수 없다.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 선수나 수영의 박태환 선수는 아무리 한국 수영과 피겨의 저변이 약하더라도 개인의 출중한 기량만으로 금메달을 따내며 전설적인 경기를 선보였었다.

하지만 배구는 단체 종목이라 아무리 개인이 잘해도 팀 성적이 좋지 못하면 빛을 발하기 쉽지 않다.
그런 김연경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20세기 최고의 배구 선수로 남자는 미국 배구와 비치발리볼의 전설 카치 키랠리선수가 선정됐고 여자 선수는 쿠바 올림픽 3연패의 주역 토레스 선수가 선정됐었다.
한국팀은 당시 조혜정, 박미희 선수를 추천했던 걸로 안다.
이때 일본의 시라이와 중국의 랑피 선수가 최고선수로 특별 언급됐던 걸로 기억한다.

70년대 일본 여자배구팀의 전성기때 한국계 일본선수 시라이 선수가 있었다.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의 주역이자 세계선수권 대회 우승을 이끌었던 선수이다. 배구 경기 중 딱 2번(아마 한번은 프레올림픽 때 한국, 한번은 72년 올림픽 때 소련) 져봤다고 하니 당시 일본팀의 무서운 기세를 엿볼만 하다.
랑핑이 이끌었던 80년대 중국 역시 LA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월드컵 등 주요 대회를 휩쓸었다고 한다.

분명 70년대 일본, 80년대 중국 대표팀은 전설적인 기록을 남겼고 그 중심에 섰던 시라이와 랑핑은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김연경 선수의 개인기량은 나날이 성장해 현재는 최전성기를 맞았다.
마침 최전성기 때 4년전 부상으로 건너뛰어야 했던 올림픽 무대를 다시 맞았고 죽음의 조를 넘어 올림픽 챔피언 브라질, 월드텁 우승팀 이탈리아 등 강팀을 연파하며 4강에 올랐다.

개인적으로 팀 성적이 받쳐주지 못해 김연경 선수가 시라이나 랑핑처럼 기억되지 못할까봐 항상 아쉬웠었다.
하지만 올림픽 4강에 36년만에 올랐고 올림픽 MVP 자리에 올랐다.
 
 
21세기 최고의 배구 선수로 가야할 길 : 협회의 지원과 구단의 협조, 그리고 해외 진출

비록 올림픽 메달은 목에 걸지 못했지만 올림픽 4강 진출을 이뤄냈다.
장신 선수로 세대교체 한 이후 2010 광저우 아시아 게임 아쉬운 은메달 이후 다시금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결승전 5세트 때 금메달을 목전에 두고도 조수홍의 쉬운 서브를 연속 리시브 범실을 저질러 다 따놓았던 아시아게임 금메달을 넘겨줘야 했다.
앞으로 다시 올림픽 4년이 남았고 그 사이에 2014년 세계선수권과 2015년 월드컵 그리고 해마다 열리는 그랑프리대회가 있다.

이 대회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한다. 이미 김연경 선수는 전성기에 물이 올랐다. 세대교체의 한 주역이던 양효진 선수의 높이도 좋고 올림픽을 통해 김희진 선수도 많은 성장을 이뤘다.
특히 한송이 선수가 단단하게 성장했고 대각자리를 적어도 2년은 지켜 줄 것이며 황연주 선수도 부상관리만 잘 해줘 2010 세계선수권과 아시아게임 때의 공격력만 되찾아 준다면 든든한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양효진을 비롯, 김희진과 박정아, 표승주, 염혜선 같은 리그에서 자라고 있는 후배들도 김연경 선수를 보며 자신감과 꿈을 가졌을 것이다.

이번 런던 올림픽은 한국여자배구팀이 꾸릴 수 있는 최대치의 베스트 멤버가 아니었다.
적어도 남지연 선수는 수비 요원으로 선발 됐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구단들은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선수차출에 비협조적이었다.
다들 올림픽 8강 진출도 힘들다 싶었을 것이고 국제대회에는 언제나 비협조적이다.

협회 이사 출신인 김형실 감독이 팀들과 싸우고 언론 플레이를 해서라도 최상의 조합을 해주길 바랐지만 그랑프리를 거치면서 드러난 몇 가지 약점을 메우지 못한 채 올림픽에 가야했다.
그리고 협회의 지원은 뭐 전무했다고 알고 있다.
일본의 그 빵빵한 지원들을 보며 스스로 라이벌이라 여기고 있는 한국의 협회는 아무 생각도 없다는 게 개탄스러울 뿐이다.

97년 그랑프리 3위를 이끌었던 김형실 감독의 올림픽 4강 업적은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본다.
하지만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각 경기 때마다 컨디션을 봐가며 선수 선발을 내세웠다면 4강 미국전에서 갑자기 흔들린 최강 미국을 잡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 이해가 안간 용병술로 경기를 그르쳤다.
이탈리아전의 이숙자가 보여준 절정, 브라질전에서 보여준 김사니의 절정의 기량, 실력은 비슷하다.
미국전 1세트 초반부터 김사니의 라이트 백토스가 연달에 상대편 코트로 넘어갔을 때 과감히 교체를 했었야 했다.
이기지 못했더라도 이 아쉬움이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뭐 하나 제대로 김연경 선수와 한국 대표팀에 지원이 되지 않은 가운데 4강을 이끌어 냈다.

그 원동력은 김연경의 해외진출 이후 올라선 절정의 기량과 김연경 선수와 같이 올림픽 예선과 그랑프리를 거치며 선수들이 각자 제 역할을 평소보다 더 잘해줬다는 것이다.

공수 양면에서 김연경과 한송이가 거의 다 해줬다해도 무방했고 이숙자와 호홉을 맞춘 양효진과 정대영의 중앙공격은 매서웠다. 특히 정대영과 양효진의 높은 블로킹 만큼은 한국의 강점이었다.
특히 올림픽에서는 서브가 약해졌지만 높은 사이드 블록과 이동 공격 등으로 쏠쏠한 활약을 해준 김희진이 큰 경험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값진 결과다.


해외진출, 김연경 뿐만 아니라 후배들까지 해외진출해야

김연경 선수가 국내 V리그 뛸 때도 원톱이었지만 지금처럼 전무후무한 단계까지 올라서진 못했었다.
일본 무대를 거치고 유럽무대 챔피언스리그 MVP까지 수상하며 공격, 수비, 블록 뿐만 아니라 자신감과 투지까지 클래스가 더 올라갔다.

김연경 선수가 국내에 머물렀다면 지금 이 세계 원톱의 클래스까지는 오르지 못했으리라 본다.
더 단단해졌고 높이에 파워까지 더 겸비해졌다.

김연경 선수의 영향을 받아 김희진, 박정아, 표승주 같은 어린선수들이 자극을 받아 해외진출을 시도해 봤음 한다.
해외진출을 위해선 공격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작은 신장을 커버해 줄 수비력과 기술, 투지 등이 필요하다는 걸 스스로 느낄 것이다.
이번 코보컵 때 박정아 선수가 또 수비에서 빠지고 표승주선수도 라이트에서 뛰느라 수비에서 빠지는 모습을 보이던데 수비까지 내가 해내야 한다고 달라들어서 실력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김연경 선수처럼 높이 날도록 노력하면 김연경 선수와 함께 한국 여자배구팀이 좋은 성적을 계속 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연경 선수가 앞으로 4년 다음 올림픽까지 국제무대를 휩쓸며 20세기의 토레스의 뒤를 이어 21세기 최고 여자배구선수로 남을 기록들을 써내려가길 바란다.
아마도 스스로 부상관리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국제대회 때마다 협회의 지원이 필수적이고 팀은 발목을 잡지 말고 해외무대에서 날도록 놓아주어야 하며 후배와 동료들도 해외진출 등을 통해 실력을 쌓아서 함께 대표팀을 잘 이끌어 줘야한다.

* 김연경이 일본에 처음 진출할 때 흥국생명이 훗날 김연경이 서른 넘어 국내복귀 할 때를 대비해 자유롭게 풀어준 줄 알았다.
선수생명은 길어졌고 김연경의 수비력과 공격력이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국내에서는 항상 제 몫 이상을 해 줄 선수이기에 당연히 젊은 시절에 더 크게 성장하도록 풀어준 줄 알았다.
그러면 훗날 국내로 리턴했을 때 당연히 보은 차원에서 흥국생명에서 계속 뛰기로 약속이나 한 줄 알았지만 그건 아니었나 보다.
어쨌든 선수생명이 짧은 편인 배구지만 서른 전에 국내무대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 세계 최고 리그에서 계속 명성을 쌓고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국가대표 주전으로 또 세계무대에서 실력을 겨뤄야 한다.
 

[여자배구,김연경] 우리는 ' 여자배구의 메시 ' 김연경 선수를 잃을 수도 있다...;





지금 런던 올림픽 여자 배구팀에서 우리나라를 4강을 이끌면서
대단한 활약중인 김연경 선수인데요....
과연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라고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많을듯 합니다.
 
현재 김연경 선수는 소속팀과 애매한 관계로 난국에 부딪힌 상황입니다.
잘 해결이 되야하겠지만... 지금 문제가 그리 쉬워보이지가 않더군요..
소속팀과의 어떤 문제가 있는지 한 분의 글을 가져와 봤습니다.
(출처 : mlb파크 icarus13님)
먼저 김연경의 현재 신분을 정확히 하는 것이 중요할 듯 합니다.
김연경은 05~06 시즌에 흥국생명에서 데뷔하며 08~09시즌까지 총 네 시즌을 뛰었습니다.
여자배구 FA 취득 연안은 6시즌 인데 데뷔시즌부터 신인왕 겸 MVP로 시작해 더 이상 국내 무대
에서 이룰 것이 없었고 팬, 관계자 할 것 없이 한국배구 발전이라는 대의를 위해
김연경을 해외로 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결국 08~09시즌 후 김연경은 흥국생명의 자매결연 팀인 일본의 JT 마베라스로 진출했고
여기서 2시즌을 보내며 일본 리그를 초토화 시켰습니다.

좀 이야기가 다른 길로 세는 거 같긴 하지만 이때도 흥국생명의
막장짓이 있었는데 시즌이 우리나라보다 먼저 끝나는 일본 리그를 마친 김연경을
결승전에만 잠시 뛰게 하려는 꼼수를 부렸고
(소속은 흥국생명이고 임대 형식이라 이게 가능은 하다더군요;)
다른 구단들이 이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해외 임대 선수가 국내 구단으로 돌아와 시즌을 치를 경우
시즌 잔여 경기의 25%만 뛰어도 그 선수는 국내리그 한 시즌을 뛴 것으로 친다는
사상 초유의 룰, 이른바 '김연경 룰'까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일본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 2년 임대 계약이 끝나자 김연경은
보다 큰 무대인 터키 리그로 진출했고 시즌 매우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마침내 세계 최고 선
수의 반열에 오릅니다. 뭔 이야기가 이리 길어졌는지 모르겠는데 -_- 어쨌든 정리하면 김연경은
국내에서 4시즌을 뛰었고 임대계약 형태로 해외에서 3시즌을 뛴, 공식적으로는 아직 흥국생명 선수이고
FA까지는 2시즌이 남았다..가 모든 사건의 베이스입니다.

챔스리그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김연경의 거취가 주목받던 무렵, 난데없는 뉴스가 터집니다.
흥국생명이 뜬금없이 김연경의 국내복귀를 통보한 것이죠.
누가 봐도 이해가 안가는 이 처사의 이면에는 김연경이 지난 시즌 중 체결
에이전트 계약이 있었습니다. 국내 규정 상 에이전트를 선임하려면 연맹이나 소속구단과 협
의를 거쳐야 하는데 김연경은 그냥 개인적으로 에이전트 계약을 했다는 것이지요.

사실 아무리 막장이라도 김연경 국내 복귀는 말이 안되는 소리라 협의 끝에 흥국생명이
내놓은 절충안은 김연경이 에이전트 계약을 파기하고 대신 우리가 좋은 해외팀을 찾아줄테니 그
팀으로 가서 뛰라는 것이었습니다.

김연경은 자기가 원하는 팀으로 가지 못한다면 배구를 그만둘 수도 있다는 초강수를 띄우며 대응했구요.
 

 
이까지 보시면 이런 의문을 가지실 수도 있을겁니다.
사정이야 어쨌든 규정대로라면 흥국생명은 잘못한게 없고
더구나 해외진출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좋은 팀 찾아준다는데
김연경이 너무 멋대로 고집을 피우는게 아닌가..
사실 저도 김연경 팬이지만 저런 생각을 안한건 아니거든요;
너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거 아닌가? 이런 생각.

그런데 김연경의 터키 진출 과정과 이번 협상 과정에서 벌어진 흥국생명의
아연실색할 막장짓이 보도되고나니
김연경이 왜 저렇게까지 극렬하게 반응하는지 조금 이해가 되더군요.

터키 페네르바체로 진출할 때 김연경이 받은 연봉은 세금을 빼면 약 6억원이었다고 합니다.
이 중 흥국생명은 1억 2천만원을 흥국생명에 기부하라고 '액수를 정해서' 통보했고
김연경 부모님이 반대하자 그럼 1억이라도? 이런 식으로 나오다 6천만원까지 '깎아' 줬습니다.
무한도전에 나오는 '억지 기부'보다도 더한 '강제 기부'가 그것도 정찰제로 이루어진 셈이죠.

여자배구를 관심있게 보신 분들은 기억하실텐데 김연경이 이번 시즌 터키를 떠나 아제르바이잔으로 간다
뉴스의 주인공이었던 아제르바이잔 라비타 비쿠팀과의 협상도 황당했습니다.

이 팀이 뜬금없이 나타난게 아니라 원래 김연경 영입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었고
김연경이 개인적으로 계약한 에이전트, 흥국생명 양쪽 다 이 팀에서 이러저러한
오퍼를 받았다고 했는데 에이전트에 의하면 이 팀이 오퍼한 금액이 100만 유로였습니다.
그런데 흥국생명은 80만 유로의 오퍼가 왔고 이게 오퍼온 팀 중 최고 대우였다며
김연경을 아제르바이잔으로 보내기로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을 하죠....
20만 유로가 공중에서 사라져버린 것만도 황당한데 이 계약은 김연경이 모르는 사이에 추진되었습니다.

돈이 전부가 아니거늘 (김연경은 터키 리그를 떠나고 싶지 않아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여기가 돈 제
일 많이 주니까 여기로 가라는 것도 어이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그 돈도 엄청 사라진체로
계약 체결이라니 원래 FA 취득 연안이 그렇기 때문인지 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김연경의 에이전트 측
김연경과 흥국생명이 맺은 표준 계약서에 의하면 계약기간은 6년이므로 이미 계약이 만료되어
흥국생명이 주장하는 김연경 보유권은 이미 소멸되었다고 반박합니다.
흥국생명은 김연경에게 오퍼한 유럽 팀들에게 저 에이전트 가짜니까 속지 말라고 공문을 보냅니다.

이렇게 양측이 맞서는 가운데 마침내 7월 3일 흥국생명은 김연경을 해외임대선수에 관한
규정 위반으로 임의탈퇴 공시하기에 이릅니다.

이로인해 KOVO 룰 상으로는 김연경은 흥국생명의 동의 없이는 이적이 불가능하며
임의탈퇴 공시일로부터 한 달 이내에 원 소속팀으로 복귀해야만 하는 신분이 되었습니다.
이미 그 한 달은 넘었구요. 즉 이대로라면 김연경은 미아가 됩니다.

그런데 지난 16일 김연경 에이전트 측은 흥국생명이 뭐라고 하든가 말든가
터키 페네르바체와 105만 유로x2년 재계약을 맺었다고 발표하죠.
(김연경이 현존 최고연봉자라는 소리는 이것을 기준으로 한 것일 겁니다.)

아닌게 아니라 입찰이 붙는 과정에서 위에서 말한 아제르바이잔의 비쿠팀은 120만 유로까지
비딩했으나 김연경이 터키를 떠나고 싶지 않아 한다는 이유로 페네르바체와 계약했다고 설명했습니
다. 흥국생명은 즉시 강력하게 반발하며 에이전트 계약 자체가 불법이므로 그 에이전트를 통해 맺은 계
약은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던 와중 올림픽 기간이 닥쳐 사실상 대표팀 전력의 5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는 김연경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협회가 나서 모든 문제는 올림픽이 끝나고 나서
논의하자고 미뤄둔 상태입니다. 말 그대로 미뤄뒀을 뿐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는 셈이죠.
 
 
김연경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현재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흥국생명에 복귀하여 2시즌을 뛰어 FA 자격을 취득하는 것 입니다.
임의탈퇴 신분이라 그것도 원칙적으로는 불가하지만 복귀 즉시 우승 전력을 만들 수 있는 선수인데다
분위기 자체가 원칙도 좋지만 임의탈퇴 처분은 너무 가혹하다는 쪽이라 흥국생명과 연맹이 샤바샤바해서
복귀 길을 열어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겁니다.

두 번째는 지금 밀고 나가고 있는대로 에이전트 계약에 문제가 없음을 인정받는 것 입니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김연경 측의 주장대로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음을 인정 받는거고
그보다 더 중요한게 국제이적동의서(ITC)를 발급 받는 겁니다.
ITC는 이적하려는 팀이 소속된 국가 협회
원 소속팀의 국가의 협회(대한 배구 협회) 양쪽의 동의가 필요한데
키협회에서 반대할 이유는 당연히 없고 대한배구협회는 KOVO룰 위반이 명백해서 ITC 발급 동의
못해주겠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김연경이 워낙 특별한 존재이다보니 임태희까지 나서서 중재하겠다고 하고는 있습니다.
배구계 원로들도 김연경이니까 봐주자는 측과 아무리 그래도 원칙이 무너지면 안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
는 측으로 나뉘어 혼란스러운 상태라고 하구요.

세 번째는 법적 분쟁으로 끌고가 법정에서 승리하는 길입니다.
법적으로 김연경에 대한 흥국생명의 보유권이 소멸되었음을 인정받는 것이지요.
물론 이럴 경우 최소 1시즌 정도는 통으로 날릴 각오를 해야합니다.

네 번째는 터키로 귀화를 추진하는 방법입니다.
KOVO 룰이 일종의 로컬룰이라 귀화하면 더 이상 구속력이 없다고 하더군요.

마지막은 최악의 파국, 김연경이 애대로 배구 선수를 그만두는 것 입니다.
배구를 그만둔다는데 보유권이고 뭐고 없죠 -_;

위에 열거한 다섯가지의 옵션 중 2번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경우,
우리는 한국이 낳은 배구 천재,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선수'라는 김연경을 이대로 잃게 됩니
다. 강호 이태리를 격파하고 메달 가시권까지 들어간 이상 반드시 메달 획득에 성공해 국민의 관심을 많
이 받고 흥국생명의 막장짓도 널리 알려져서 우리가 김연경을 잃게 되는 파국이 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상황에 놓였는데 꼭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대성할 선수를...... 만약 흥국생명이 발목을 잡아서 앞길을 막아놓는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질까요;;
 
 

배구선수 박철우.



박철우에 'ㅂ'는 알아요.

뜨악 배구랑은 거리가 매우멀지만, 가끔씩 미니언니따라 총총걸음으로 간다.

근데 배구는 정신도 없고 규칙도 모르겠고 너무 어려워.

하지만 그래도 딱하나.

박철우는 좋다.

우유빛깔피부에 배구도 잘하고 키도 좋고 웃는모습도 이쁘고.

그래서 배구장을 박철우보러 간다는 것이 나한테는 맞다.

즉 배구장 아니고ㅋㅋ박철우장ㅋㅋㅋㅋㅋㅋ
 
 
응원석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선수를 찍기란 힘들어 ::
300장 중에서 290장이 다 박철우 ㅋㅋㅋ
뭐 내가 박철우선수 보러 배구장가는거니깐요ㅎㅎ
 
 
서브화이팅 ㅋㅋㅋㅋ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조만간 또 다시 뵈요 ^^

농구선수가 박사되다! 샤킬 오닐




 NBA 공룡센터 오닐, 박사되다 <조선일보 05-07>



 
 
킬 오닐 (Shaquille O’Neal)
 
 
현역시절 '공룡센터'로 불리며 코트를 누볐던 전 미국프로농구(NBA) 선수 샤킬 오닐(40)이 박사가 됐다.

오닐은 5일 미국 마이애미주(州) 배리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해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마이애미 헤럴드가 보도했다. 그는 "사람들은 나를 단지 농구선수로 알고 있겠지만 나는 학생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루이지애나주립대(LSU) 2학년을 마친 뒤 1992년 드래프트를 통해 NBA에 데뷔했다. "학업부터 마치라"며 말리는 어머니에게 "훗날 반드시 졸업하겠다"고 약속하고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첫해 신인왕 수상을 시작으로 농구 선수로서 승승장구하면서도 오닐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시즌 중에는 온라인 강좌로 학점을 채웠고 시즌이 끝나면 캠퍼스로 돌아가 계절학기를 수강하며 2000년 LSU 졸업식에서 학사모를 썼다.

오닐은 학사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피닉스대학 온라인 강좌에 등록해 2005년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받았고 이듬해 소속팀을 우승으로 이끈 뒤 배리대학 박사 과정에 등록했다. 그는 박사 과정 4년 반 가운데 2년 반 동안 선수로 뛰면서 위성중계 되는 수업과 화상 콘퍼런스, 인터넷 강좌 등을 수강하며 평점 3.813의 우수한 성적으로 과정을 마쳤다. 박사 논문 주제는 기업 경영자들이 직장 내에서 유머를 활용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오닐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이 가장 큰 성취"라고 말했다.

졸업식에 참석한 어머니 루실은 "아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이제 아들을 '오닐 박사'라고 불러야겠다"고 말했다. 오닐은 다음 목표로 "로스쿨 진학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오닐은 키 216㎝, 몸무게 147㎏의 거구에서 내리꽂는 덩크슛으로 백보드를 부수는 괴력을 발휘해 공룡센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김강한 기자

이번 5월달부터 일주일에 최소 2회 신문을 읽고 인상깊은 특정기사나 사설을 정해 나의 생각을 기록하려고 한다. 한창 마동훈 교수님께 세계사수업을 받을 때 열심히 이 신문스크랩을 했었는데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신문스크랩도 안하게 되었다. 신문은 계속 꾸준히 읽어왔지만 좋은 기사를 읽고,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긴 사설들을 읽었을 때도 그냥 읽는 것으로만 끝나서 마음이 찜찜할 때가 많았다. 좀 늦은 것같지만 이제부터라도 다시 시작하는 게 어디나. 오랫만에 신문스크랩을 하려고 글을 쓰는 이 순간이 왠지 설렌다! ^^
연습을 하고 쉬는시간에 신문을 읽는데 저 두툼한 입술의 농구선수 기사가 나를 끌어당겼다. 물론 저 농구선수의 사진보다는, 농구선수가 박사가 되었는 의미의 기사제목이 내 흥미를 끄는 데 제일 큰 몫을 했다.
샤킬 오닐이라는 선수는 NBA선수들 중에서도 최고라고 불리는 선수라고 한다.
프로필을 봐보니 무슨 상을 엄청나게 받은 선수였다. 프로농구선수로 그것도 NBA에서 활동하는 프로선수라면
정말 팀훈련하랴 개인연습하랴 모든 시간을 운동에 투자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샤킬 오닐이라는 농구선수는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틈틈히 공부를 해 경영학석사도 따고 자기 팀을 우승으로 이끈 해에 박사과정에 등록해 결국 5일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무수히 많은 경기리그에 나가고 우승도 많이 이끌어냈다고 한다. 분명히 공부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을 그였을 것이지만, 그는 2년 반동안이나 선수로 뛰면서도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고, 화상으로 강좌를 수강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박사과정을 마쳤다고 한다.
농구와 교육학과 경역학이라.. 전혀 관계가 있어보이지 않는 세 가지를 이 샤킬오닐은 어느 한 분야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고 또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로스쿨에까지 도전한다고 말한다.
몇몇의 사람들은 아직도 예체능을 하는 사람은 머리가 좀 떨어진다 라고 말하는데 아니다 그렇지 않다. 샤킬 오닐 뿐만 아니라 예체능 하는 이들 중 공부도 잘하고 다방면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이는 이들이 꽤 많다.
나는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인으로써의 삶을 살 것이지만 "음악만"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공부도 너무 하고 싶다. 관심있는 분야가 정말 너무 많다. 아직 현실을 모르는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렇다. 나는 음악과 별개로 공부하고픈 과목들이 많다. 나도 샤킬 오닐같이 음악에 있어서도 확고한 신념과 실력을 갖춘 음악인이면서도, 외형으로만 봤을 땐 예술과 거리있을 과목을 공부하고 그 분야에 있어서도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가진 학자가 되고 싶다. 앞으로 대학에 가기 전까지, 또 대학에 들어가서도 계속 생각이 바뀔 수 있겠지만 나는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다. 역사, 철학, 심리학 등등. 이 각각의 분야도 깊게 파고들면 또 셀수없이 다양한 것들이 있음을 안다. 그래서 더 관심이 있다. 인류학, 세계인권, 국제학 이런 국제적인 과목도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실제로 재미있을진 모르지만 공부하고 싶은 분야이다.
글이 좀 길어졌는데, 암튼 나도 샤킬 오닐같은 선수같이 한 곳에 안주하고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 예체능을 하지만 학문에도 욕심을 가지고 도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최재천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통섭'의 마인드를 가지고 융합적 사고를 지녀
음악과 인문학을 섞었을 때 나올 수 있는 그 어떤 창의적인 일을 성취해내고 싶다!

미국의 농구 선수 데릭 로즈



 
데릭 Martell 로즈 (1988년 10월 4일 출생), 국립 농구 협회 (NBA). 시카고에서 출생의 시카고 불스에 대한 미국의 프로 농구 선수 그의 세가지 형들에서 농구 게임을 배운 로즈. 고에서 학교, 그는 두 주 대회 챔피언을 수상하였으며 졸업 후 미국에서 최고의 포인트 가드 전망으로 스카우트 평가했다. [인용이 필요] 그는 멤피스 타이거스 대학 선수로 2008 년에 번의 전미 전국 챔피언 게임에 도달했습니다.
 
 
얼마 후, 2008 NBA 초안에 대한 선언 로즈와 시카고 불스가 전체 첫번째 선정되었다. 프로 농구 자신의 첫 해에, 그리고 올 신인으로 선정 올해 [3]의 신참 선정되었습니다 로즈 팀 [4] 두 번째 시즌에, 로즈는 2010 년 NBA 올스타 게임에 대한 NBA 올스타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2010 년 FIBA​​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미국 팀을위한 시작 명명 하였다 초안이 된 이후, 로즈 매년 NBA 플레이 오프에 불스을 이끌었습니다. 2011 년, 그는이 상을 탈 수있는 사상 최연소 선수가되고, NBA 가장 훌륭한 선수 상을 받았습니다.
 
 
유일한 시카고 불스 선수가 honor.In 2009 년 우승으로 그는 마이클 조던에 합류, 번의 전미 대학 조사 장미의 토 점수는 멤피스에서 뛰고 그 소급하여 자격이있게 무효가 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번의 전미 멤피스의 전체 2007-08 season.Derrick 장미는 잉글 우드 지역, 시카고의 사우스 사이드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 중 하나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비웠다.
 
 
그는 브렌다 로즈의 4 웨인, 레지와 앨런 후 아들하지만, 7 년 만에 처음이었다. 세가 가르쳐 준 재능 농구 선수가,스포츠에 대한 그의 재능으로 성장했다. 주변 코트에서와 농구의 아웃 로즈, 로즈 된 그의 어머니와 제한 형제을 선도하고, 시카고의 농구 서클에 훨씬 더 외부 관심을 끌기 시작 NBA 자신의 길을 두려워 그에게 연락 이외의 착취와 같은 전 시카고 전망 로니 분야의 경우와 같은 거리의 대리인으로 외부에 의해 탈선 될 것입니다.

 



 

인기 농구 선수 코비 브라이언트



 
코비 브라이언트는 콩 (1978년 8월 23일 출생) 전국 농구 협회 (NBA)의 LA 레이커스에 대한 촬영 경비를 담당하고 미국 프로 농구 선수이다. 그는 국가의 최고 고등학교 농구 선수로 인정 된 곳 브라이언트는, 낮은 Merion 고등학교에서 성공적으로 고등학교 농구 경력을 즐겼다. 그는 졸업 후 NBA 초안에 대한 그의 자격을 선언 한 다음, LA 레이커스에 거래 샬롯 호네츠의 1996 NBA 초안에 13 전체 곡괭이와 함께 선정되었습니다. 신참으로 브라이언트는 자신에게 높은 전단과 1997 년 슬램 덩크 대회에서 우승하여 좋아하는 팬으로 명성을 받았습니다.
 
 
브라이언트와 샤킬 오닐은 2000 년부터 2002 년에 세 연속 NBA 챔피언 레이커스을 이끌었습니다. 2004 년 NBA 결승에서 듀오와 손실 사이의 온수 불화는 2003-04 시즌 이후 레이커스의 오닐의 무역에 이어되었다. 오닐의 출발에 이어 브라이언트는 LA 레이커스 프랜차이즈의 초석이되었다. 그는 그 과정에서 많은 점수 기록을 설정, 2005-06 및 2006-07 시즌 동안 점수에 NBA을 이끌었습니다. 2006 년 브라이언트가 토론토 랩터스를 상대로 경력 높은 81 점을 기록, 두 번째 가장 포인트는 1962 년 윌트 챔벌린 100 점 게임 만 초 NBA 역사에서 하나의 게임에 이끌었다. 그는 2008 년 정규 시즌의 가장 훌륭한 선수 상 (MVP) 수상했습니다. 2008 년 NBA 결승에서 패배 한 후, 브라이언트는 두 경우에 NBA 결승 MVP 상을 획득, 2009 년과 2010 년 연속 2 챔피언 레이커스을 이끌었습니다.
 
 
2012년 6월 현재, 브라이언트는 세 번째와 리그의 모든 시간이 포스트 시즌 점수 및 모든 시간 정규 시즌 점수 목록, 각각의 다섯째 순위를 정합니다. 그는 또한 레이커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모든 시간이 최고점을 올리는 선수입니다. 리그에서 두 번째 년 이후, 민호는 지난 14 년 개최 된 모든 NBA 올스타 게임을 시작하려면 선택되었습니다. 그는 NBA 역사에서 가장 올스타 MVP 상에 그를 매는, 올스타 MVP 상 네 번 (2002, 2007, 2009 및 2011) 수상했다. 그는 올 NBA 팀의 14 시간 회원 및 올 방어 팀의 12 시간 회원이며 그는 또한 방어 영예를받을 수 사상 최연소 선수이다. 2008 년 2012 년 하계 올림픽에서, 그는 미국 국가 팀의 일원으로 금메달을 수상했다. 2009 년, 스포츠 뉴스 및 TNT라는 브라이언트 2000 년대의 맨 NBA 선수 (십 년).
 
 
2003 년 브라이언트가 콜로라도에있는 호텔 직원과 성관계를 가진 후 성폭행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 피고가 증언하기를 거부 한 후 2004 년 9 월, 검찰이 사건을 떨어 뜨 렸어요. 민사 재판은 나중에 제기 및 법원에서 해결되었습니다.